방촌황희선생

황희는 흔히 ‘황희정승’으로 불린다. 그는 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위대한 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로 평가받는 세종시대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세종 없는 황희가 없고 황희 없는 세종이 없다. 위대한 성군과 훌륭한 재상이 하나가 되어 위대한 세종시대를 열었으니, 이는 역사의 귀감일 뿐 아니라 21세기 이 시대에도 교훈이 된다.

황희(黃喜)는 1363년(공민왕 12) 2월 10일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강릉도호부사 황군서(黃君瑞)이고, 어머니는 감문위 호군 김우(金祐)의 딸 용궁 김씨다. 방촌 황희의 본관은 장수(長水)다. 장수 황씨의 시조는 신라 말에 시중 벼슬을 지낸 황경(黃瓊)이며, 그의 부인은 경순왕의 장녀였다.

황희의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는데 희(喜)로 고쳤고, 자는 구부(懼夫), 자호(自號)가 방촌(厖村)이었다. 그가 처음 벼슬에 나아간 것은 14세 되던 1376년(우왕 2)에 복안궁(福安宮) 녹사(綠事)였다. 그는 처음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부모의 강권에 따라 1383년(우왕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년 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하였으며, 1389년(창왕 1)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 학관에 보직됨으로써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56년간의 관직생활을 하면서 24년간 재상으로 있었고, 그 가운데 18년동안 영의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그리고 좌의정 1회, 우의정 1회, 찬성 1회, 참찬 2회, 의정부 지사 1회, 의정부 참지사 1회, 이조판서 3회, 예조판서 3회, 형조판서 2회, 호조판서 1회, 병조판서 2회, 공조판서 1회, 대사헌 3회, 한성부윤 1회 등 나라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러한 풍부한 행정 경험으로 그는 오랜 동안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고,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아래 국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안도와 강원도의 감사로 나가자 관리들은 두려워하게 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였으며, 6조 판서를 역임 할 때는 정사는 닦아지고 폐정과 모순은 시정되었다. 정사의 의논에 참여해서는 세종은 심복처럼 그를 기댔고, 사림은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 명나라 사신을 전담해 능숙하게 요리했고, 1품계에 올라서는 군부(軍府)의 일을 장악했으며, 3의정이 되어서는 백관을 지도해 길흉을 점치는 시귀(蓍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온갖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재상으로 24년, 영의정으로 18년을 재직하였으니,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우례가 없는 일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영광을 누리게 한 것일까? 그것은 타고난 총명과 후덕한 성품 그리고 청렴한 인품과 공명정대한 처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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